- [성경본문] 이사야53:4-9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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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입을 열지 않으시는 예수님
2022년 4월 10일 주일 창원더사랑교회 설교
본문: 사 53:4-9
샬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간에는 제가 코로나확진으로 자가격리를 하였습니다. 자가격리를 하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전도학교를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전도폭발훈련이나 바울전도학교 복음제시내용과는 다르게 새로운 복음제시법을 만들고 교재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전도학교 이름도 새롭게 “행복전도학교” 라고 지었습니다. 이름 좋지요? 이 “행복전도학교”가 앞으로 우리 창원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도훈련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한국교회에서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지난 주간에는 참 의미 있는 한 주를 보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면서 왕이신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이기 때문에 오늘은 이사야 53장을 본문으로 하여서 ‘입을 열지 않으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이사야 53장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장으로 메시야가 고난 받는 모습으로 오실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려 700년 후에 그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가 이사야 53장을 읽어보면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고난 받는 종이 바로 예수님이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 53:4-9)
그렇지요? 저절로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구나..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예수님을 믿을 적에 이 본문을 보면서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더 확실하게 성경 말씀을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무조건적으로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가 있느냐?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서 죄를 짓게 만드느냐..애초에 처음부터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왜 하나님은 굳이 선악과를 만들었느냐?
내가 이 질문하면 선생님이나 목사님이 대답하기 어려울텐데 하면서 그런 질문을 많이 했어요. 처음부터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고 궁금하면 질문하고 내가 이해되지 않으면 믿지 않았어요. 이해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믿을 때 성경탐구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그 덕택에 오늘 이렇게 목사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 이야기가 나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고 천사의 인도하심을 따라 길을 가다가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만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왔다가 수레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중에 빌립을 만난 것이죠. 빌립이 보니까 내시가 수레에서 책을 읽고 있어요. 그게 뭔가하여 가까이 가서 보니 내시가 구약성경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물었어요. 그래 읽고 있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느냐? 깨닫는 것이 있느냐? 그러니까 내시가 하는 말이 ‘잘 모르겠습니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면서 빌립에게 수레에 오를 것을 청합니다.
빌립이 수레에 올라 앉아서 내시가 읽고 있는 성경책을 보니까 마침 읽고 있는 것이 이사야 53장 7,8절 말씀인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내시가 묻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예언자 자신을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그래서 빌립이 이 성경구절로 시작해서 그 내시에게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한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돈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고쳐주셨어요. 오늘날 죽을 병에 걸렸는데 어떤 의사가 돈도 받지 않고 무료로 고쳐주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의사는 전 국민적인 영웅이 됩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무료로 고쳐주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전 세계가 난리납니다. 대한민국에 ‘의사 성인’이 나타났다고 전세계 메스컴에 대서특필할 것입니다.
그것만 한 것이 아니지요.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심지어 동족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세리들과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세리가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동족들로부터 세금을 부당하게 많이 거두어서 착취하는 동족 배신자가 아닙니까? 우리말로 하면 친일파입니다. 그것도 동족들로부터 고혈을 빼먹는 반민족 친일파와 같은 사람이 바로 세리였습니다. 그래서 동족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찾아가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줍니다.
모든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창녀들까지도 예수님은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그들의 벗이 되어 주셨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인 중의 성인’이라고 할만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로마군병에게 잡혀갔어요. 아무 죄가 없는데 모함을 받았어요. 억울한 누명을 쓴 겁니다.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니 로마에 반역자이다. 그런 누명을 씌운 것이지요. 그래서 십자가에 위에 죄패 명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공식적인 예수님의 죄명입니다.
억울하다... 억울하다... 억울해도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습니다. 뭐라도 억울함을 푸시면 좋겠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억울함을 푸시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그럴 능력도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억울하다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모든 고난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그런데 그 고난이 얼마나 비참한가? 그 모습이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이 도수장으로 질질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그렇게 끌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잠잠했습니다.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자신의 결백을 아시고, 자신이 죄가 없음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그 십자가의 길이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 곧 사명의 길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군병도 원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침을 뱉고 조롱하고, 자신을 채찍으로 때리는 로마 군병 원망하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서 유대인의 소리가 들립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자신을 왕이라 하는 자는 황제를 반역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여기저기서 비아냥 거리고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유대인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단 한마디 원망하거나 화를 내거나 저주하지 않으시고 그의 입을 열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곧 사형집행을 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은 무죄임을 밝히지 않고 묵묵히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었습니다.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명의 길은 힘든 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인간이신지라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내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길을 거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실 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명의 길입니다. 사명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힘든 길입니다. 왜냐하면 사명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로 살아가고 있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힘듭니다.
누구나 다 엄마가 되고, 엄마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만 엄마로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직장을 다 다니지만 직장을 다니는 것은 쉬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직장인으로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업을 하지만 사명감을 갖고 사업을 하는 사람은 어렵습니다. 쉽지가 않아요.
왜 사명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힘든가?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엄마로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냥 엄마로 살아가기는 쉬워요. 그냥 평소처럼 하면 됩니다. 그러나 엄마로 사명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힘들어요.
학교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냥 학교에 다니면서 주어진 시간 성실하게 아이들을 가르치면 됩니다. 그러나 학교 선생님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선생님들은 정말 힘들어요. 정말 요즘 아이들을 사랑하며 교육하며 교사하기가 정말 힘들어요. 그러나 우리 꿈나무들은 학교에서 정말 사명감을 갖고 일하시는 교사들을 만나기 바랍니다. 학교에서 그런 교사를 만나는 것은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로 살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명감을 갖고 목회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명감을 갖고 살아가는 목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길이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큰 길을 버리고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들어요. 그러나 여러분, 사명감을 갖고 목회하는 목회자를 만나는 사람은 정말 복 있는 성도들입니다.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명감을 갖고 엄마 노릇하기 정말 힘들어요. 이 세상에 엄마는 많습니다. 그러나 사명감이 있는 엄마가 되어야 합니다. 사명감을 갖고 있는 엄마를 만나는 자녀는 정말 복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명감을 가진 사람은 그 길이 아무리 좁은 길이요, 험한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고통의 길이라 할지라도 묵묵히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목사로서 사명감을 갖고 사역하는 사람은 성도들 때문에 불평하지 않습니다. 엄마로서 사명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식 때문에 불평하지 않습니다.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사람은 그 일 때문에 불평하지 않습니다.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교사는 학생들 때문에 불평 원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을 사랑하면서 그 일을 묵묵히 해 나갈 뿐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이 바로 사명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여도 입을 열지 않으시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 길이 십자가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사명을 다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그 세대 중에 어느 한 사람, 그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예수님이 왜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지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요. 우리가 입장 바꿔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여러분, 어머니가 자식을 키우느라고 먹을 것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아끼고 또 아껴서 제대로 된 옷 하나 사 입지 못하고, 화장품 하나 사지 못하고, 치아가 빠지고 해도 자식 학원 보내고 공부시키느라 자신의 치아 치료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틀니를 끼우고 아끼고 아껴서 자식을 키웠는데, 그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으로 공부해서 성공한 자식은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우리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세련되지 못하고, 다른 엄마들보다 늙어서 부끄럽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고난당하고 죽으셨어도 아무도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를 사랑하여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하여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말을 요란하게 하지 않습니다. 다만 수고와 눈물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꿈나무 여러분, 엄마는 자식을 위한 사랑을 말로 표현하지 않고, 평소의 수고와 헌신으로 말을 합니다. 아침밥을 차려주고, 저녁밥을 차려주는 것을 보고 엄마의 사랑을 알기 바랍니다. 아빠가 옷을 사주고 용돈을 주고, 학원비를 내주고, 과외비를 내주고, 공부를 시켜주는 것을 아빠의 사랑으로 알기 바랍니다. 평소에 하는 행동에 부모의 사랑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 안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안해 주어도 이미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다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 하나도 들어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보여주셨습니다. 이미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만 해도 ‘하나님의 사랑’ 그것 하나로 완벽합니다. 우리의 질병 고쳐주지 않아도, 우리에게 많은 부와 명예를 주지 않아도, 우리에게 일자리 주지 않아도, 대학에 합격시키지 않아도, 우리 주님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 다 보여주셨어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자신의 목숨을 내 주심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아무 변명하지 않으시고, 억울하다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그래서 목숨을 잃었지만 진심으로 억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꺼이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희생제물이 되어서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예수님은 얼마든지 죽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번의 희생으로 우리를 위한 십자가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죄없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는 것을 억울해 하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 당하셨습니다. 2022년 고난 주간에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에 감동하는 고난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사명을 되돌아보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깊이 생각합니다. 이번 고난 주간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묵상하며 우리 마음안에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새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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