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사도행전20:33-38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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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2022년 3월 6일 창원더사랑교회 주일 설교
행 20:33-38
샬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번재 주일입니다. 해마다 오는 사순절이지만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을 더욱 깊이 묵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을 맞아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전도 여행중에 밀레도에서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오게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면 감옥에 가게 되고 다시는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22-2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최근에 아내와 몇몇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만약에 내가 6개월 시한부 암판정을 받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저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항암치료를 하지 않고 남은 6개월 동안 내가 인생을 살면서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을 만나서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내가 잘못했던 사람들을 만나서 나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겠다.”
이렇게 바울은 지금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성령께서 여러분을 교회 감독자로 삼으셔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성도들을 잘 살피십시오.
둘째, 내가 떠난 후에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기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을 든든하게 세울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당부합니다. 그 마지막 당부의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입니다.
33절부터 35절까지 말씀을 다시 한번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아멘!
내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준 것과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한번 따라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세계적인 부자였던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살에는 미국의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55세 된 어느 날 암에 걸리게 되고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습니다.
눈앞에 캄캄해진 록펠러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병원 복도를 쳐다봤을 때 벽에 걸려 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그 문구에 그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마침 그때 병원 한구석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가봤더니 환자인 여자 아이는 구석에 앉아 울고 있고 병원비가 없어 입원을 시킬 수 없다는 병원 측과 아이를 입원시켜 달라는 부모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본 록펠러는 갑자가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느꼈습니다.
머릿속에 강렬한 깨달음을 얻은 그는 즉시 비서를 불러서 자신의 이름을 절대로 밝히지 말고 그 여자 아이의 입원비를 대신 지불하게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병원을 찾은 록펠러는 회복된 여자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록펠러는 그 순간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기적 같게도 자신의 암도 회복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록펠러는 나눔의 삶을 살았고, 무려 43년이나 더한 98세까지 장수하고 생을 마쳤습니다.
지금도 <록펠러재단>은 그의 정신으로 인류복지 증진을 위해 많은 이들을 돕고 있는 단체입니다. 그가 인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남긴 말은 “삶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 줄 미처 몰랐다. 내 인생의 나머지 43년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데 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랑을 주는 것보다 사랑을 받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는 어떻습니까?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주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여기에 아직 동의가 되지 않으신다면 아마도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행복하기도 하겠지만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행복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은 원래 그런 겁니다.
사랑은 댓가가 아닙니다. 사랑은 본래 댓가가 없는 무조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소중하고, 사랑하는 것 그 자체가 행복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신앙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입니다. 몸으로 직접 경험해야만 아는 것입니다. 머리로 이해할 때는 사랑을 받는 것이 참 행복하고 좋아보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해보면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그러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로 이해할 때는 어디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머리로만 이해할 때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기보다는 많이 받으려 합니다. 자신의 것을 나눠주기 보다는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머리로 이해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다보면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삶을 살다 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매주 토요일마다 도시락을 70개 만들어서 마산역에 가서 노숙인들과 생활이 어려운 분들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도시락 나눔을 한지 벌써 만 1년이 지났습니다. 누가 복이 있을까요? 도시락을 받는 분들이 더 복이 있나요? 아니면 우리가 더 복이 있나요? 당연히 도시락을 만들어서 나눠주는 사람이 더 복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원래 사람이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사람은 나 자신을 위하여 살아갈 때는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울 때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른 사람을 도울 때 행복을 느끼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면 살수록 그 사람은 더 고독하고 외로움을 느끼고 우울합니다.
반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아갈 때 사람은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딱 두 개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계명을 지키게 되면 우리 안에 기쁨이 가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참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진짜 행복과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주머니를 열어서 이웃에게 나눠 줄 때 진정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몸으로 경험하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면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열어 보지 않았거나 봉사활동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신앙의 삶은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달 전에 피지의 이창호 선교사님 가족이 창원에 오셨습니다. 그 때 여러분이 특별헌금한 것을 선교사님께 드렸습니다. 셋째 따님과 넷째 막내 아들이 함께 왔는데 식사 대접해 드리고 헤어지면서 막내 아들 세영이를 데리고 아래층에 있는 cu 편의점에 갔습니다. 그리고 큰 바구니를 갖다주고는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담으라고 했습니다. 세영이 입이 귀에 걸쳐져서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담았는데 저는 한 몇 십만원 어치를 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계산해 보니 5만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피지에 살아서 그런지 얼마나 순수한지 몰라요.
그런데 이 아이가 그런 말을 한답니다.
빨리 피지에 돌아가서 노숙인 아저씨들이 보고 싶다고..
선교사님도 피지에서 1주일에 한 번 노숙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역을 합니다. 그때마다 세영이가 음식을 쟁반에 담아서 노숙인들에게 갖다 드리는데, 영상을 보니까 세영이가 그 노숙인들과 자연스럽게 악수도 하고, 활짝 웃는 모습으로 노숙인을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영상을 보면서 세영이는 어릴 적부터 참 바른 신앙생활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웃 사랑 아무리 말하면 무얼 합니까? 노숙자 보면 슬슬 피하고 눈빛부터 달라지는데....
나보다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보면 무시하고, 나보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 무시하고..이것은 껍데기입니다.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어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받는 교회가 아니라 주는 교회가 될 때 진정한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는 마음이 고와야 합니다. 노숙인들 도시락 나눠주면서 무슨 거지 보듯이 하면서 도시락을 주면 안됩니다. 혹시라도 우리 마음에 죄성이 있어서 그런 마음이 들 수가 있어요. 그때마다 자신의 악한 마음을 회개하고 노숙인들을 예수님처럼 볼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도시락을 드려야 합니다.
진실로 그분들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대하듯이 그분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손길, 우리의 눈빛, 우리의 목소리가 예수님 대하듯이 공손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가난을 끊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이 세상의 모든 가난을 끊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이 땅에 남아 있어야 이 세상이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이 세상에 행복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서로 도우면서 행복해지고, 도움을 받으면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구나를 몸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매주 목요일마다 호떡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호떡을 구워드리면서 교회에 나오라는 말도 하지 않고, 사람들이 왜 호떡을 무료로 주는지 물어보지 않으면 먼저 교회에서 왔다는 말도 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 전도라기 보다는 호떡 나눔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립니다.
어느 날 중학생 2명이 음료수를 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음료수 병에 메모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정성스레 손 편지를 썼는데, 이렇게 적혀져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아이들과 어른들을 위해 호떡을 굽는 모습이 멋있었습니다, 저희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어요.”
주는 사람은 행복해지고, 받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사랑을 많이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렇게 해서 사랑은 계속 흘러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을 남겨두시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다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이미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은 것만 해도 우리는 충분한 사랑을 받았어요. 그래서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 아내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 자식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 원망하지 말고, 이제는 사랑을 하십시오.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을 주십시오.
남편에게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남편에게 사랑을 주십시오. 아내에게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아내에게 사랑을 주십시오. 부모님에게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부모님에게 사랑을 주십시오. 목회자에게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목회자에게 사랑을 주십시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로 옳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는 자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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