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Ⅰ서5:11-1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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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영생의 확신은 현재의 삶을 결정한다.
2022년 2월 20일 창원더사랑교회 주일 설교
본문: 요일 5:11-13
샬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될 겁니다.
어느 대그룹의 회장이 겨울 등산을 하다가 갑자기 심한 눈보라에 길을 잃었습니다. 얼마나 헤매었는지 날씨는 어두워지고, 배는 허기지고, 몸은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그는 죽을 것만 같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정신을 차리고 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 저 멀리 초라한 초가지붕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고 죽을 힘을 다해 그 집에 갔습니다. 그 집엔 마침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없는 형편이었지만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하여 그 회장에게 주었고, 방을 따뜻하게 하여 회장의 몸을 녹여주어서 회장의 몸은 회복이 되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회장은 너무 감사해서 할머니에게 백지 수표를 건내며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고 그 집을 나왔습니다.
그 다음 해에 회장은 그 할머니가 생각나서 고맙기도 하고 요즘 형편이 궁금하기도 하여 그 집을 다시 찾았으나 회장의 생각과는 달리 그 집은 초가집 그대로였고,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는데, 아무도 시신을 수습도 하지 않은채 시신이 이미 심하게 부패 되어 있었습니다. 백지 수표까지 할머니에게 건네 준 회장은 이상해서 방안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가 건네준 백지 수표는 추운 찬 바람을 막았던 것으로 보이는 문풍지로 사용되어 있었습니다. 회장은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건네 준 백지 수표가 할머니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가 조금만 그 백지 수표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할머니는 그 백지 수표로 새로 집을 짓고 온갖 부귀영화도 누릴 법도 하였지만 그 할머니는 애석하게도 그 용도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채 아쉽게도 추위와 굶주림과 병마로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대기업 회장이 백지 수표를 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백지 수표로 자동차도 사고, 집도 사고, 헌금도 하고, 주식투자도 하고, 적금도 하고, 기부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그 백지수표로 종이비행기를 만들어서 날려 버리기도 할 것이고, 할머니처럼 문풍지로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쓸데없다고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혹은 여러분 가족이 이런 행위를 한다면 여러분은 그 어리석은 행동에 화가 나서 잠도 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백지수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백지 수표..저는 그 백지 수표를 ‘영생의 백지수표’라고 생각합니다. 백지 수표는 그 백지수표를 발행한 사람이 지급을 보장한 것으로 발행인이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할머니가 받은 백지 수표는 대기업 회장이 그의 노후를 보장해주는 백지 수표라고 한다면 우리가 받은 백지 수표는 하나님이 발행한 것으로 우리의 영생을 보장하는 백지 수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이 발행한 영생의 백지수표를 믿는다면 우리는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영생의 확신은 현재의 삶을 결정한다.”입니다.
영생의 확신, 다른 말로 우리는 이것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왔던 용어입니다. ‘영생의 확신’ 혹은 ‘구원의 확신’
이 영생의 확신은 단순히 성경 공부 시간에 질문하고 답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오늘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은 오늘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네.. 저는 오늘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아, 이 사람은 바른 믿음을 갖고 있구나....이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렇게 머리로 생각하고 머리로 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은 머리로 알고 입으로 말하는 추상적인 개념의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삶 그 자체입니다. 삶과 연결이 되지 않는 신앙은 너무 추상적이고,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림자는 실제가 아닙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고백하는 영생의 확신은 실제의 삶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실제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영생의 확신은 현재의 삶을 결정한다” 이렇게 정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영생의 확신은 현재의 삶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생에 대하여 우리에게 여러 차례 강조를 합니다.
오늘 본문 요일 5:11,12절을 보십시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여기서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 영원한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을 누가 증거하는가? 하나님이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하나님의 증거만큼 더 확실한 증거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또 누가 증언하는가? 바로 예수님이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5:24절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증거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예수님도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사도 요한도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 13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고 증거합니다. 그 증거가 하나님의 증거요, 그 증거가 예수님의 증거요, 사도들의 증거입니다.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곳곳마다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을까요? 그 만큼 영생의 확신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왜 영생의 확신이 중요한가? 영생 혹은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의 최종목적지 곧 우리 인생의 최종 결과입니다. 여러분 인생, 최종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잘 되어야지요.
지금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하는 중인데 오늘 폐막합니다. 동계올림픽에서 우리 대한민국이 가장 강한 종목이 쇼트트랙인데, 1500미터에서 최민정 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이런 경주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최종 골인 장면입니다. 중간에 아무리 1등하면 뭐합니까? 최종 몇 등으로 들어오느냐..최종 결과가 중요합니다. 중간에 꼴등으로 달리더라도 최종 1등하면 금메달의 영광이 돌아갑니다. 중간에 꼴등했다는 것은 아무런 흠이 안됩니다. 최종 결과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간에 아무리 힘들어도 최종 결과가 좋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 보십시오.
40대까지는 성공적으로 잘 살다가 50대에 쫄닥 망하는 경우와
40대까지는 고생스럽게 살다가도 50대에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당연히 두 번째를 선택하겠지요.
우리 인생, 최종 결과가 중요합니다.
자, 그런데 우리 삶이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 9:27절 말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 인생이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 최종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이냐? 영벌이냐?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의 최종 결과가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아니면 영원한 벌을 받느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곧 구원이고, 영원한 벌을 받는 것은 곧 멸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최종 결과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우리는 승리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누가 증거하고 있는가? 하나님 아버지가 증거하고 있고, 예수님이 증거하고 있고, 사도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 곳곳에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계속 알려주고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사도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왜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가?
이 영생의 확신이 현재의 삶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 대한민국과 일본의 숙명의 대결이 있습니다. 월드컵 본선 축구 한일전..
이런 날이 오면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사일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들이 잠을 자지 못하고 이 숙명의 라이벌 한일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일전, 치열한 명승부가 벌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반전에만 5골을 먹었어요. 난리가 났습니다.
지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대한민국이 네덜란드에게 5:0으로 졌어요. 그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차범근 감독이 해임되었었지요. 그런데 이번 한일전은 전반전에만 5골을 먹었어요. 나라 망신 시켜도 유분수지..여기저기서 실망감과 분노, 안타까움,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이렇게 되면 후반전 마칠 때까지 끝까지 tv를 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냥 속상해서 꺼버립니다. 불안해서 볼 수가 없습니다. 보는 내내 속이 터지고 화가 납니다.
그런데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똑같이 월드컵 한일전..경기는 전반전에만 5:0으로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기는 사람들이 기대하면서 봅니다. 알고 봤더니 이미 최종 경기 결과가 6:5로 이긴 경기입니다. 전반전에 5:0으로 지고 있었는데 후반전 10분을 남기고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후반전 10분 동안 무려 6골을 몰아치기로 넣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기가 생중계가 되지 않은 관계로 지금 아무도 그 경기를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려고 밤을 새면서 보고 있어요. 그런데 밤을 새면서 보는 경기가 5:0으로 지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열 받는 사람이 없어요. 분노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재미있게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승리한 경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승리한 경기는 중간에 아무리 지고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극적인 마지막 승부가 더 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이미 영생을 얻은 삶입니다. 이미 승리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영벌이 아니라 영생을 얻었고,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것을 하나님이 증거하고, 예수님이 증거하고, 사도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 현재의 삶을 잘 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미 승리한 삶. 이미 영생 얻은 삶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구원받은 삶입니다. 이 세상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여러분은 이미 영생이 보장된 삶이고, 죽어도 여러분은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의 삶, 잘 견디고, 잘 참아내고, 멋지게 사십시오. 영생 얻은 삶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잘 살아내야 합니다.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현재의 삶을 잘 살아내야 합니다.
중간에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입시 실패할 수 있고, 대학 입시 실패할 수 있고, 취직 실패할 수 있고, 결혼도 못할 수도 있고, 결혼하고도 잘 살지 못할 수도 있고, 중간에 아플 수도 있고, 직장에서 짤릴 수도 있고,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 때문에 승진이 안될 수도 있고, 믿음 생활하는데 종교의 자유가 박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미움 당할 수도 있고, 교회에 다니는 것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무시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실패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삶의 현장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실패하고, 내가 가난하고, 내가 아프고, 내가 잘 안되는 것.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일을 통하여 사람은 더욱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늘 승승장구 하던 삶이 실패를 통하여 겸손해 지고, 나의 아픔과 고통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같이 교만하고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겸손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겸손은 그냥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댓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우월감을 갖고 무시하는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하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엄청난 댓가가 따릅니다.
본성적으로 타락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답게 변할 수 있겠습니까?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답게 변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댓가가 따릅니다.
여러분이 지금 당하는 실패와 아픔, 고난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그 고난의 정도가 적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말로 표현하기에는 힘들고 어려울 정도의 고난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이 당하는 그 고통과 고난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런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답게 더 멋지게 변하는 겁니다.
어떤 회사원이 실수로 회사에 10억이라는 손실을 입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회사원은 너무 죄송해서 그 회사를 더 이상 다닐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실수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사장님께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그 때 사장님이 사직서를 반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10억을 들여서 인재를 키웠는데, 그 인재가 이제 그만 두면 어떻게 하는가?”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 어려움은 돈으로 살수 없는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과 고통은 쓸모없는 고난과 고통이 아닙니다.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한 것 같고, 부끄러워보일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원은 회사에 끼친 손실이 너무 죄송하고 부끄러워서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으나 사장님은 그 손실을 인재를 키우는 비용으로 생각한 것처럼 내가 당하는 현실이 너무 부끄러울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전혀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인답게 빚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 영생의 확신은 현재의 삶을 결정합니다. 사람마다 당하는 현재의 삶이 각각 다 다르지만 영생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영생 얻은 자의 삶이 어떤 삶인지 현재 살아야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영생 얻은 자의 삶. 이미 승리한 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이미 승리한 삶, 영생 얻은 자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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