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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침묵 이유
강동협 2021-03-21 추천 0 댓글 0 조회 943

예수님의 침묵 이유

2021321일 창원더사랑교회 주일 설교

본문: 이사야 53:4-7

 

샬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예수님의 침묵 이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를 가리켜서 불리는 말들이 있습니다. 배달의 민족, 백의 민족, 한의 민족 이라는 단어가 대표적입니다. 특별히 한의 민족이라는 말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잘 말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란 원통함을 의미합니다. 억울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한의 민족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억울함이 많은 민족이라는 겁니다. 누가 이런 말을 처음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썩 유쾌한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썩 유쾌한 말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보면 억울함을 많이 겪어왔기 때문에 그런 면을 본다면 우리나라 정서에 한이 서려있다는 말을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일제로부터 강제 병탄되어 나라를 잃고, 일제의 압제하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위안부로 끌려가서 치욕을 당하고, 강제징용 되어서 일하다가 죽고,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죽은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당한 대상이 대한의 아들이고, 대한의 딸이고, 남편이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억울함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만합니다.

그 뿐만 아니지요. 제주 4.3사건이나 6.25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쓸 뿐만 아니라 죽어나가고,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죽은 것을 보면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한의 정서가 깔려있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말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억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은 주로 약자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7:19절 말씀을 보면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절대로 억울하게 만들면 안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무서워집니다.

우리 속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이 있듯이 절대로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면 안됩니다.

 

제가 우리교회에 오기 전에는 서울 광화문을 안방처럼 드나들었습니다. 광화문에 가면 1인 시위하는 사람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습니다. 1인 시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자기 몸 동서남북으로 거의 독설에 가까운 글귀를 적은 피켓을 붙이고 1인 시위를 합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얼마나 억울했으면 저럴까? 너무 억울하니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 억울해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억울해서 잠을 잘 수도 없고, 억울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직장도 그만두고 거리에 나와서 1인 시위를 하는 것입니다.

 

억울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저기 소리도 질러야 하고, 여기저기서 하소연해야 하는 법이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이 화병이 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본문을 보니까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한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4-6)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로마군병에게 잡혀서 채찍에 맞고, 희롱을 당하고, 고난을 당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라고 변호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억울함을 풀어주기는커녕 그 억울함을 호소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습니다.

억울해도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시켜주니까 너무 너무 좋은데, 예수님은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하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억울함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억울한 사람도 예수님만큼은 억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분명히 예수님의 모든 상황을 볼 때 예수님은 너무나 억울한 상황을 겪으셨지만 억울한 일을 당한 예수님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분치고는 너무 담담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도대체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 억울함을 누군가에게 호소해야 정상입니다. 억울하다고 소리치고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만히 있습니다. 침묵을 지킵니다. 단 한마디도 억울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나는 억울합니다. 이건 모함입니다.”

 

단 한마디도 재판장인 빌라도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습니다. 자신을 변명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런 침묵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어서 그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참 사람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못박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참 사람으로서 지금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그러한 억울함을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킬 수가 있는가? 예수님의 침묵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예수님께서 억울함을 당하고도 자기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예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억울함을 이깁니다. 사랑하면 억울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무시를 당해도 무시당함을 이겨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으로 인한 무시당함을 이겨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 때문에 무시를 당해도 이겨내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 때문에 억울함을 당해도 이겨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은 억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도 억울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셔도 억울하다 하지 않으시고 단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으신 이유는 바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억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주어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기 때문에 배신을 당하여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부인하고 저주해도 예수님은 억울해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우리의 능력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면 나도 사랑할 것이고, 당신이 나를 미워하면 나도 당신을 미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과 동일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하면서도 형제를 미워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모르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처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에게 그 사랑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0절 말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여서 기꺼이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심판을 대신 다 받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 안에 있고,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랑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보물입니다. 보화에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통장이 보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금붙이가 보화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부동산과 아파트가 여러분의 보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보물은 우리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저와 여러분의 보물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사랑의 보화를 잘 사용하십시오. 보화는 사용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사용하지 않으면 더 이상 보화가 아닙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을 빛나게 하십시오. 사랑으로 남편을 빛나게 하고, 사랑으로 아내를 빛나게 하십시오. 사랑으로 자녀를 빛나게 하고, 사랑으로 형제를 반짝 반짝 빛나게 하십시오.

사랑을 받기보다는 사랑을 먼저 주십시오. 사랑을 받기보다 사랑을 먼저 주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독생자를 죽게 하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자기목숨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시는 성령님까지 저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사랑받기를 기다리지 말고 사랑을 먼저 줍시다.

 

사랑은 주는 것으로 행복합니다. 사랑을 주면 그 사랑을 다시 받지 않아도 행복합니다. 사랑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주고도 억울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사랑한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저주를 받아도 억울하지 않고, 그들을 용납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능력입니다.

 

오늘 사순절 다섯째 주일을 맞아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묵상합니다.

사랑은 억울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다 용납이 됩니다. 사랑하면 다 이해가 됩니다.

보물이 우리의 몸을 빛나게 하듯이 사랑이라는 최고의 보물로 서로를 반짝 반짝 빛을 내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보화를 잘 사용하여 사랑으로 서로를 빛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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