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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신비
강동협 2021-03-17 추천 0 댓글 0 조회 1077

그리스도의 신비

 

2021314일 창원더사랑교회 주일 설교

 

본문: 이사야 52:13-15; 53:1-3

 

샬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사순절 넷째 주일을 맞아서 이사야 52:13-15; 53:1-3절을 본문으로 하여 그리스도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이사야 52:13-15절과 이사야 53장은 사순절 기간, 특별히 고난주간에 많이 읽혀지는 본문입니다. 일명 고난 받는 종의 노래라고도 합니다. 참 신기하게도 이 본문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신약 시대에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이사야 5213절과 15절의 말씀을 보면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이다.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놀라서 입을 열지 못할 것이고, 그들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을 들을 것이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때문에 온 세상이, 세계 만민이 놀랄 것이며, 그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하고, 들어보지 못한 방법으로 만민의 왕이 되셨고, 온 세계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 그런데 만민의 왕이 되시고, 온 세계의 주인이 되는 방법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 방법대로라면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 같고, 아무도 예수님을 따를 것 같지 않고,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만민의 왕으로, 온 세계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높이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여길 것 같지 않습니다.이사야도 그렇게 기록합니다. 아무도 그를 믿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5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라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겠습니까? 믿을 만 해야 믿지요. 믿을 만 해야 믿을 텐데 도저히 믿을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한 것이지요.

 

여러분,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여호와의 팔이란 말은 여호와의 능력과 권능을 상징합니다. 이 여호와의 능력과 권능이 능력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면 얼마나 좋아요?

 

당시에 이스라엘은 간절히 메시야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식민생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 앞에 높이 들려져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고, 그들의 왕이 되는 것은 어쩌면 매우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들의 임금이 되어서 여호와의 능력과 권능으로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그 여세를 몰아서 여호와의 권능으로 로마의 군대를 박살내고, 로마 황제의 항복을 받아내면 아주 간단하게 온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추앙하겠지요. 아주 간단한 시나리오입니다.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그렇게 발휘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람들은 간절히 바랬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임금이 되어주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보였습니다. 바람도 잔잔하게 하시고,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시고, 나병환자도 고치시고, 중풍병자도 고치시고 각종 질병에 걸린 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볼 때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은 곧 실현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런 능력이 충분히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정작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습니다. 연한 순 같다는 말은 연약하다는 말입니다. 연약하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메시야의 모습에 실망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무슨 유대인의 왕이 이렇게 나약해..무슨 유대인의 왕이 이렇게 볼품없어..

그러다가 사람들은 점점 더 화를 냅니다. 우리가 속았다. 저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다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라.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멸시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예수님을 버리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침을 뱉고, 어떤 사람은 조롱하고 희롱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가장 아끼던 열두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을 합니다.

 

3절 말씀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53:3)

 

예수님의 방법은 온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유대인의 왕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로마군병에게 잡히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대신 예수님은 멸시 받는 것을 택하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대신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유대인의 왕을 넘어 만민의 왕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입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신비는 낮아짐입니다. 낮아짐.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상상초월입니다. 자칭 하나님이라 하는 사람은 많아도 하나님이 인간이 된 경우는 없습니다.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위인들은 있어도 하나님 본체이신 분이 스스로 인간이 된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대표하는 단어를 떠올리라고 한다면 바로 겸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신비를 알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예수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고, 예수님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예수님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빈껍데기만 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비록 목사이고, 장로라 할지라도 목에 힘을 주고 뻣뻣한 사람은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정말 우리가 예수님의 신비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우리 꿈나무 여러분, 높아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낮은 곳으로 가려고 애를 써야 하겠습니다. 실력은 최대한 쌓아야 합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유학도 다녀오십시오. 그러나 최종 여러분이 있어야 할 곳은 낮은 곳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높은 곳에 있다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곳은 마귀가 유혹하기에 너무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에 서라고 하는데 마귀는 계속 높은 곳에 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에서 겸손하게 섬기라고 하는데, 마귀는 계속 높은 곳에서 모든 권세와 부와 명예를 누리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0:26,27)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기 바랍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18:12)

 

둘째로, 예수님의 신비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멸시도 받아냅니다. 사랑은 조롱도 받아냅니다. 사랑은 가난도 이겨내고, 사랑은 질병도 이겨냅니다. 사랑은 외면도 이겨내고, 사랑은 무시당해도 이겨냅니다.

 

3절 말씀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멸시했습니다. 로마 군병도 예수님을 조롱했고, 그의 백성들도 예수님을 희롱하고 모욕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하였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존귀하게 여긴 사람이 없이 다 그를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 예수님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외면하고 배신하여도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도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였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 예수님의 신비입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기 위해서는 이 사랑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교회와 가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는 뗄레야 뗄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입니다. 교회 없는 그리스도가 있을 수가 없고, 그리스도 없는 교회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몸 그 자체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 바로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그 신비가 무엇인가? 사랑입니다. 우리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담고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부부가 그러합니다. 에베소서 524절 이하를 보면 부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부부는 신비 그 자체입니다.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부부의 신비는 그 둘이 한 몸이라는 사실과 자기 자신을 내주는 사랑입니다.

 

왜 그리스도의 사랑이 신비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기 목숨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 것처럼 부부의 사랑은 자기 자신을 아내에게, 자기 자신을 남편에게 주는 것입니다. 배우자에게 몸도 주고, 마음도 주고, 자신의 생명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며, 이것이 부부의 신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마십시오. 세상 풍조를 따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종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종입니까?

 

아니 그리스도의 신비인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신비를 전혀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신비인 사랑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금은보화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그리스도의 신비인 사랑을 소유하였지만 그 사랑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21년 사순절 넷째 주일을 맞이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기 목숨을 온전히 내어주신 사랑으로 만민의 왕이 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으로 이 세상을 섬기면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신비의 삶이 곧 우리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처럼 겸손과 사랑의 옷을 덧입어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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