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에베소서6:14-17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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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우리가 입어야 할 전신갑주
2021년 5월 2일 창원더사랑교회 주일 설교
엡 6:14-17
샬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을 맞아서 사랑하는 우리 더사랑교회 꿈나무들이 더욱 더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사랑합니다” 격려의 박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이유”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우리가 입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에베소서 6:12절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눈에 드러나는 환경이나 눈에 보이는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우리는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싸우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도 없고, 믿음 생활을 바르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영적 전투라는 사실을 모르고 혈과 육으로 싸우는 사람은 무엇과 같으냐면 무장해제하고 싸우는 군인과 같습니다. 무장해제는 곧 항복을 의미합니다. 무장해제하면 아무리 그 사람이 강한 군인이라 할지라도 적군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비참한 삶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무엇일까요?
전신갑주는 온 몸을 보호하는 갑옷과 투구를 의미하는데, 전쟁에서 온 몸을 보호하는 보호장비와 공격 무기를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라고 지난 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말은 우리를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무기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첫째, 우리가 첫 번째로 입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진리입니다.
진리로 번역이 된 헬라어 ‘알레데이아’는 거짓이나 거짓말에 반대되는 ‘진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진리는 전신갑주의 무엇과 같은가? 허리띠와 같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허리띠를 띠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허리띠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요즘 군인에게 허리띠는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는 역할을 하게 합니다. 바지가 흘러내리면 군인이 제대로 서서 싸울 수가 없습니다. 바지가 흘러내리면 한 손으로 바지를 잡고 싸워야 하는데, 어떻게 바지를 한손으로 잡고 싸우겠습니다. 허리띠가 없으면 제대로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싸울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도 허리띠는 허리를 바로 세우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갑옷이 무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리띠로 허리를 받쳐주지 않으면 갑옷의 무게 때문에 제대로 설수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진리 곧 진실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진실은 우리의 허리를 바로 세우는 허리띠입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첫번째 전신갑주인 진리 곧 진실, 다른 말로 하면 정직은 기독교인으로서 영적 무장을 하고 마귀와 싸우는데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기초적인 전신갑주입니다.
기독교인이 진실하지 못하면 똑바로 설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전쟁에서 똑바로 서서 싸우지 못하면 이미 패배한 것입니다. 진실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한 하나님의 군사는 이미 진 것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능력이 있고, 그 사람이 아무리 명예와 권세와 힘이 있어도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한 기독교인은 영적전쟁에서 이미 진 사람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직한 교회가 영적전쟁에서 가장 강성한 교회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다고 하더라도 정직하지 못한 교회는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교회가 됩니다. 이미 영적 전쟁에서 패배한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오늘은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린이 주일, 그리고 몇 일 후면 여러분의 세상 어린이날이 다가옵니다. 이번 어린이 날에 부모님과 형, 누나들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니까 목사님이 여러분에게 블레싱 머니를 줄 테니까 예배 마치고 목사님께로 오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덕목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공부를 잘하건, 공부를 하지 못하건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에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진실하면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손해 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옆의 누군가가 다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진실하지 못하면 여러분이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세상적으로 성공해 보여도 결국 실패한 인생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여러분 주위의 누군가가 그것을 다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은 진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진정한 힘입니다. 한국교회의 힘도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가? 진실함에서 나와야 합니다. 숫자의 많고 적음에 교회의 힘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진실해야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입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 두 번째는 ‘의’입니다. “의”
오늘 본문을 보면, 의의 호심경을 붙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의로운 행동 곧 정의가 호심경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호심경은 가슴을 보호하는 가슴막이입니다. 호심경은 전쟁에서 군인이 자기 자신의 심장을 보호하는 아주 중요한 보호 장비입니다. 기독교인의 의로운 행위, 곧 정의를 행하는 것이 우리의 심장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목사로서의 정의는 성도를 잘 목양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부모로서의 정의는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자녀로서의 정의는 부모를 잘 공경하는 것이 정의이고, 형제로서의 정의는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 정의입니다. 대통령으로서의 정의는 나라를 잘 이끌어나가는 것이 정의이고, 직장인으로서의 정의는 자기의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이웃으로서의 정의는 주위의 어려운 사람이 있나 살펴보고 그들의 선한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정의인 것입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심장을 보호하는 전신갑주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정의를 행하지 못하면 심장을 보호하는 호심경을 벗어버리고 전쟁에 나간 어리석은 군인과 같습니다.
목사로서 성도들을 바로 목양하지 못하고, 부모로서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양육하지 못하고, 성도로서 성도 간에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지 못하고, 자녀로서 부모를 잘 공경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남편으로서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 못하고, 아내로서 남편을 존경하지 못하고, 이웃으로 주변의 가난하고 고통가운데 있는 이웃들의 선한 이웃이 되어주지 못하고, 직장인으로서 성실하게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이것은 이미 호심경을 벗어버리고 전쟁에 나간 군인과 같아서 반드시 영적 전쟁에서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되고 결국 영전전쟁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의의 호심경을 입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서 있는 곳에서 정의를 행하십시오. 여러분이 서 있는 곳에서 정의로운 행동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아무리 마귀가 여러분의 심장을 공격해도 그 의로운 행동이 호심경이 되어서 여러분의 심장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입어야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평화의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5절을 보면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평안의 복음이란 평화의 복음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평화의 복음으로 무장해야 하는데, 이 평화의 복음은 군인이 무장해야 할 전신갑주 중 전투화와 같습니다. 전투화를 신은 군인은 전투능력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투화를 신은 군인은 아무데나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험한 길도 헤쳐나갈 수 있고, 돌짝밭과 가시밭길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투화를 신지 않은 군인은 아무 곳도 갈수가 없습니다. 맨발로는 평탄한 길도 제대로 걸을 수 없습니다. 군인이 맨발로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산속도 헤쳐 나가야 하고, 가시밭길도 걸어야 하고, 돌짝 밭도 걸어가야 하는데 맨발로 어떻게 그렇게 험한 길을 걸을 수가 있겠습니까? 군인이 맨발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군인이 전투화를 신어야만 전쟁을 수행할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인은 평화의 복음으로 무장해야만 기독교인으로서 무엇을 하더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의 복음을 잃어버린 교회는 사회에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평화의 복음으로 무장하는 것은 우리가 나가서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부적으로 평화를 누려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성도 간에 평화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어그러진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성도 간에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고 성도끼리 서로 싸우고 다투는 교회가 무슨 평화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분쟁이 있는 교회는 이미 영적 전쟁에서 마귀에게 패할 준비가 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화평해야만 진정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분쟁 가운데 우리를 방치하면 안됩니다. 어디에서건 평화를 누리고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넷째로 우리가 입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6절을 보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방패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특별이 이 방패는 적군이 쏘는 불화살을 소멸하는 방패입니다. 방패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방패가 있겠습니다.
화살을 튕겨내는 방패도 있을 것이고, 화살을 받아내는 방패도 있을 것인데, 특별히 오늘 본문의 방패는 날아오는 불화살을 소멸하는 방패입니다. 여러분, 하늘에서 무수하게 많은 불화살이 날아오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엄청나게 많은 불화살이 날아오게 되면 굉장한 공포감을 갖기에 충분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악한 마귀가 우리를 향해 쏘아대는 불화살이 바로 그러합니다. 엄청난 위력을 갖춘 불화살이 날아오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그 때 그 불화살을 소멸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써 악한 자가 맹렬하게 쏘아 올리는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전쟁의 현장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강하고 굳건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악한 마귀의 모든 불화살을 막아낼 뿐만 아니라 그 불화살을 소멸시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불화살이 날아올 때 믿음으로 잘 막아내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의 방패가 없으면 아무리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있어도,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있어도, 평안의 복음, 평화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있어도 믿음의 방패가 없으면 하늘로부터 무수하게 날아오는 마귀의 불화살을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방패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 때 여러분의 믿음의 방패를 잘 사용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고난이 닥치거든 믿음의 방패를 사용할 때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멋지게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믿음의 방패가 없어져 버렸어요. 믿음의 방패가 왜 없어졌습니까?
평소에 믿음의 방패를 사용하지 않다보니까 막상 믿음의 방패를 사용하고자 했을 때 아무리 찾아도 그 믿음의 방패를 어디다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의 방패는 어디에 있습니까? 수십 년간 혹은 수년간 믿음의 방패를 사용하지 않아서 그 믿음의 방패를 분실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 믿음의 방패를 찾아서 바로 여러분 곁에 두십시오. 그러면 어떠한 악한 마귀의 모든 불화살의 공격도 다 막아낼 뿐만 아니라 그 불화살도 소멸할 수가 있습니다.
다섯째로 우리가 입어야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의 말씀을 보면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는 장비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군인이 머리에 쓰는 철모(하이바)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군인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만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철모입니다. 저도 군 생활 할 때 비상이 걸리면 각자가 자기 군장을 싸서 자신이 배치 받은 장소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 자대 배치를 받고 처음 비상이 걸렸는데 고참들이 얼마나 군기를 잡으면서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다그치는지 정신없이 군장을 싸고 지정된 장소로 갔는데, 갑자가 고참이 제 머리를 딱 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제 머리에 있어야 할 하이바가 없는 겁니다. 얼마나 황당하든지, 전쟁 상황가운데서 그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이 알지 못하니까 하이바를 쓰지 않고 전쟁에 나온 격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머리로는 구원의 확신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구원의 확신을 기억하지 못해요. 그래서 고통의 순간, 박해의 순간이 오면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이라도 이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구원의 확신은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어도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는 그런 차원의 구원의 확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는가? 영적전쟁에서 우리가 구원의 투구로 무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원의 확신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박해를 당할 때 그 고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요일부터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시에는 도미티아누수 황제 숭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이 엄청난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고,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맹수의 사냥감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화형을 당하는데 나무에 매달려서 거기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서 어둠을 밝히는 횃불로 이용당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박해를 당하는 순간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러한 고난과 박해를 묵묵히 이겨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 내가 죽음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제 천국에서 눈을 뜰 것이다’ 라는 구원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카타콤은 옛날 로마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서 숨어 살았던 곳입니다
하루는 로마의 군인들이 카타콤을 습격했습니다.
워낙 미로여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지만 입구에 있던 몇몇 사람이 붙잡혔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카타콤 앞에 있는 광장에서 그들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순식간에 죽는 형벌이 아니지요. 고통당하면서 서서히 죽게 만드는 것이 십자가 처형입니다.
깊은 밤이 되니까 로마 군인들도 이제는 숙소로 다 돌아갔습니다.
그때 어둠 속을 헤치면서 십자가에 다가가는 물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어린 자녀들이었습니다.
아빠, 엄마를 부르면서 십자가로 다가갔습니다. 그때 그 부모들이 울고 있는 자녀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예수 믿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란다. 너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라.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얘들아, 잠시 뒤에 저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의 확신을 머리로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몸으로 구원의 확신을 느끼고 있습니까?
군인이 전투 중에도 항상 투구, 하이바를 머리에 쓰고 있듯이, 우리도 항상 구원의 확신을 몸에 징표처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환난과 박해의 순간에도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갖고 믿음의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입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전신갑주, 그러니까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의 특성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역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전신갑주인 검은 적을 공격하여 적을 제압하는 무기입니다. 그 영적인 무기, 그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특별히 성령의 검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검이란 하나님의 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전신갑주는 바로 하나님의 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악한 마귀와의 영적인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기 위해서는 결국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몸에 늘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꿈나무들이 암송하고 있는 것은 성령의 검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날이 서게 갈아야 합니다. 반드시 검은 날이 서 있어야 합니다. 날이 무딘 검은 무겁기만 하고 거추장스럽듯이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갈고 닦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요즘 저는 미현이와 빈이에게 매주 전화를 해서 암송을 점검합니다. 암송하고 나서 꼭 질문을 합니다. 예를 들면 지난 주에 미현이가 신명기 6:4-9절까지 말씀을 암송했는데, 어떤 말씀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느냐라고 물었더니 신명기 6:5절 말씀이 제일 마음에 와 닿았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그래서 제가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물론 답변은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에 억지로 꼭 답변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제가 질문을 던짐으로써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냥 기계적으로 암송하지 말고 암송하면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 늘 생각하면서 암송하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묵상입니다. 늘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활에 실천하게 하면 저절로 말씀의 날이 날카롭게 서서 여러분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능력 있는 말씀이 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전쟁에 있는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결국 우리는 계속 악한 마귀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하게 됩니다. 계속 힘들어집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마귀와 싸우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게 됩니다. 영적 탈진 상태까지 오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는 육을 가진 사람이어서 영적 탈진이 오는데 마귀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전혀 지치지 않고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고 계속 공격을 합니다.
결국 우리를 마귀에게서 승리하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너머에 있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임을 알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잘 무장하여 마귀와의 영적전쟁에서 날마다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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