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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삶을 위해 기도합시다
강동협 2021-02-06 추천 0 댓글 0 조회 878
[성경본문] 요한복음17:1-5 개역개정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제공: 대한성서공회

영화로운 삶을 위해 기도합시다.

 

202127일 창원더사랑교회 주일 설교

 

본문: 17:1-5

 

사람들은 모두 영화로운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영화로운 삶이란 몸이 귀하게 되어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고 빛나는 삶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광스런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로운 삶입니다. 누구나 다 이런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고 빛나는 살을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나온 동네는 순간적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고, 대통령이 태어나거나 어릴 적 살았던 집은 순식간에 유명관광코스가 됩니다. 그럴 때는 그 집이 초라하면 초라할수록 더 가치가 있고 빛나는 법입니다.

정치인으로서의 최고의 영광은 역시 대통령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경제인으로서의 최고의 영광은 대한민국의 최고의 기업의 총수가 되는 것이겠고, 의사로서의 최고의 영광은 대통령의 주치의가 된다든가 아니면 대한민국 최고 병원의 병원장이 되는 것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삼성병원 병원장이 되든가, 세브란스병원 병원장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공무원으로서의 최고의 영광은 국무총리가 될 것이고, 검사로서의 최고 영광은 검찰총장이 되는 것일 것입니다.

학생으로서의 최고의 영광은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합격한다든가 아니면 서울대학교 의대에 합격하는 것이겠지요.

과학자로서의 최고의 영광은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이겠고, 영화인으로서 최고의 영광은 영화계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것이겠습니다.

교육인으로서 최고의 영광은 교육감이 된다든가 아니면 교육부장관이 되는 것이겠지요.

이것은 흔히들 우리가 생각하는 영화입니다. 옛날 조선시대로 말할 것 같으면 과거에 장원급제하여서 높은 벼슬까지 올라가는 것이 최고의 영화입니다.

 

이런 의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영화로운 삶 하면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에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고, 공무원은 고급공무원이 되고, 직장인은 승진하여 임원이 되고, 목회자는 교회가 부흥하여서 큰 교회 목사가 되고, 아니면 노회장이 되거나 총회장이 되고..이런 것을 영화로운 삶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것을 부정할 수가 없어요. 눈에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냥 예수님이 그렇게 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화로운 삶에 대한 욕구를 마음껏 누리면서 살라고 허락해 주시면 마음 편하게 그렇게 추구하면서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있는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유명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서 기도를 합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시고, 둘째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십니다. 마지막 셋째는 제자들의 전도를 통해 앞으로 예수님을 믿게 될 미래의 신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시는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가장 먼저 하십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하실 때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를 먼저 하십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대개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먼저하고,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는 나중에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주 독특하게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이타적인 분이 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먼저 하셨을까?

 

그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는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예수님의 기도가 굉장히 이기적인 기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거잖아요. 저는 솔직히 대놓고 그런 기도는 못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로 대놓고 말씀도 잘 하십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때는 제자들이 다 흩어지고, 예수님 홀로 남겨질 때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부분에 있는 요한복음 16:32절 말씀을 보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는 제자들이 다 흩어지고 예수님 홀로 십자가에 남겨질 때입니다.

 

제자들은 다 각각 흩어지고 이제 저 홀로 남겨질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이제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인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여, 제자들이 다 흩어지고 나 홀로 남겨질 때가 이르렀사오니 이제 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아들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기도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옵소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전에,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먼저 십자가에 못박혀 영화롭게 되어야 제자들을 위한 기도, 세상을 위한 기도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장 먼저 여러분이 영화롭게 되기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자식을 위하여 기도하기 전에,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기 전에,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기 전에 가장 먼저 여러분이 영화롭게 되기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런데 그 영화가 무엇입니까?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사업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세상에 이름을 내는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것이 나의 영화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이제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이라고 기도했습니까?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왜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사라고 하지 않으시고, 빙 둘려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고 하셨겠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영화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화인 것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영화로운 삶을 위해 기도합시다입니다. 제목에 낚이셨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했다면 설교제목을 보는 순간 예배에 대한 사모함이 막 사라졌겠지요. 그게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의 진정한 영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진정한 영화는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십자가에 나 자신을 못 박든,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삶을 당하든..그것이 진정한 영화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둘째로,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야만 하나님 아버지을 영화롭게 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주옵소서로 기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만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나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드러나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5:8절 말씀에,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셨는지 하나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확증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할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그리고는 내가 무엇을 잘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어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거나 의사가 되거나 판사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줄 압니다. 여러분, 그런 말에 절대로 속으면 안됩니다. 이 세상 모든 부와 권세를 갖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그런 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기도를 보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함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큰 영화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나 자신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나자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도 영화롭게 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흔히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처럼 학생이 공부를 잘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수 있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입니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기회도 없어요. 그리고 변명거리가 너무 많습니다. 나는 과외를 할수 없어서 공부를 못했어요. 나는 학원에 다닐 수가 없어서 공부를 못했어요. 나는 집안형편이 어려웠어요. 부모님이 싸워서 마음이 불안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어요. 공부를 잘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면 얼마든지 변명할 수가 있습니다.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할 수 있습니까?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남녀, 노소 구분 없습니다. 부자건 가난하건 상관없습니다. 건강하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습니다. 아내 남편, 부모와 자녀 상관없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혈기를 부릴 만한 상황이 오면 여러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여러분을 영화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영화롭게 되면 여러분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 사람을 살립니다.

2절 말씀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권세를 포함한 모든 권세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자기 자신의 목숨을 버릴수 있는 권세를 의미합니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는 만민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고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버릴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만민에게 영생을 준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생명을 살리는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님과 함께 못박히는 십자가는 사람을 살리는 십자가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면 다른 사람이 살아납니다. 내가 죽으면 자식이 살고, 내가 죽으면 남편이 살고, 내가 죽으면 아내가 삽니다. 내가 죽으면 며느리가 살고, 내가 죽으면 시어머니가 삽니다. 내가 죽으면 목사가 살고, 내가 죽으면 성도가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달려 죽을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는 것, 영생은 무엇인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예수님께서 영생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안다라는 것은 부부간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정미 사모를 아는 사람은 강동협 목사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만큼 친밀한 단어입니다. 부부외에는 자식도 모르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앎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는 관계가 무엇을 통해서 일어나는가?

내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면 내 자식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알고, 내 남편이 예수그리스도를 그렇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삶을 통해 내 이웃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내 가족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그렇게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 자식들이 하나님을 잘 알고, 예수님을 잘 알아가는 것은 부모의 믿음의 삶을 보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배우자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믿음의 삶을 보면서 남편도, 아내도 하나님을 알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왜 내 배우자가 변하지 않고, 왜 내 자식들이 변하지 않고, 왜 나의 가족들이 변하지 않는가? (죄송합니다.) 내가 온전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절대로 남을 탓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내가 부족해서 그렇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내가 참지 못하고, 내가 부족해서 그렇다. 내가 아직 십자가에서 죽지 못하고 혈기가 남아 있어서 그렇지 내 아내에게 무슨 문제가 있고, 내 남편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만 억울하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억울한 신앙이 아니라 사랑의 신앙입니다. 사랑에는 억울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여서 문제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계산된 그런 종교였다면 벌써 사라져도 벌써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자리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고, 예수님은 이 권세를 잘 사용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릴 권세를 잘 사용하셔서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십자가에서 우리 자신을 못 박을 권세가 있습니다. 이 권세를 잘 사용하면 내 가족이 살고, 우리 더사랑교회가 살고, 우리 대한민국이 살아납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힐 권세를 잘 사용하면 내 가족이 하나님을 알고 내 이웃이 예수님을 알아갑니다.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에 우리 자신을 못박게 함으로써 가장 먼저 우리가 영화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리고, 이것을 통하여 우리의 가족이 살고, 이웃이 살고, 우리 더사랑교회가 살고, 우리 대한민국이 살고, 우리 가족과 이웃이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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