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걸음씩 믿음으로 걷는 삶
- 강동협 2025.3.23 조회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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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도행전23 : 1 - 11 | 개역개정
-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 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 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한 걸음씩 믿음으로 걷는 삶
2025년 3월 23일 창원더사랑교회 주일 설교
1. 치유와 회복을 위한 기도
2. 설교를 위한 기도
3. 설교
본문: 행 23:1-11
샬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천국인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행복하십시오.
오늘은 사도행전 23장 1-11절까지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서 ‘한걸음씩 믿음으로 걷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여러분의 인생을 표현하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제가 이 질문을 chat gpt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답변합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표현하라고 하면 참 흥미로운 질문이 될 것 같아요.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죠. 예를 들어:
"내 인생은 마치 한 곡의 재즈처럼…" 혹은 "내 삶은 줄타기와도 같아."처럼, 삶을 독특한 이미지나 상황에 빗대어 표현할 수도 있어요.“
내 인생은 마치 한 곡의 재즈처럼, 내 삶은 줄타기와도 같아..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표현해 본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로 설명해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의 인생은 ‘가나안으로 걸어가는 삶’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의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기 위해 그들은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걸어간 것을 보면 한 번에 가나안으로 직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걸어갔습니다. 그렇게 걸어간 세월이 4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이지요. 여러분, 걸어서 40년을 간다고 한다면 얼마만한 거리를 걸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구 반대편으로 걸어서 가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가정하고 계산해 보면 약 501일이 걸립니다. 지구의 반지름이 20,037km 정도 됩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이 걷는 속도를 시속 5km로 잡으면 하루 8시간씩 걷게 되면 5km*8시간=40km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의 반지름 20,037km÷40km(하루 걸을 수 있는 거리)= 501일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매일 걸었다고 가정하면 이론상으로는 2년도 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데까지 무려 40년이 걸렸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보는 바울의 인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고별설교를 합니다. 그들이 서로 헤어지는 장면을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바울이 왜 그들을 떠납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는 겁니다. 어디로요?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사도행전 20:22-23절 말씀을 보면,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성령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라.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다가 고별설교를 하면서 그들에게 권면을 하고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해 갑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제자들마다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붙잡습니다. 두로에 도착했는데 거기에서 7일을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던 제자들이 바울보고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 그리고 가이사랴에 도착해서 일곱집사 중 한명인 빌립의 집에 머물렀는데 아가보라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발을 잡아 메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이 말을 듣고 빌립의 집에 있던 사람들이 바울보고 울면서 말립니다. 예루살렘에 가지 마시라..
그러자 바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여러분, 바울이 이렇게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바울보고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만류한 것은 아주 타당하고, 간절했고, 진심으로 만류했어요. 눈물을 흘리면서..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아서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울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야고보 사도와 여러 형제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예루살렘에 갔는데 무엇이 기다린다고 했습니까?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했지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유대인들이 난리가 납니다. 온 성이 난리가 난겁니다. 성경을 보니까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로마군대의 천부장에게까지 들린 겁니다. 사도행전 21:31-36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여러분, 이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집니까?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기 위하여 얼마나 소란을 피우는지 그들이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할 때 로마군대의 천부장이 군인들을 이끌고 와서 그들의 손에서 바울을 구합니다. 그 때 바울이 천부장에게 말합니다.
“나는 유대인이라 나는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백성에게 말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천부장의 허락을 받고 바울이 층대위에서 올라서서 백성들을 조용하게 한 다음에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말하는데 무슨 말을 하느냐면?
바울이 회심하게 된 이야기를 말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간증을 한 겁니다. 간증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닙니까? 바울은 지금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같으면 누군가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적이잖아요? 특별히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하는데 그것이 보통 이야기입니까? 기가 막히게 환상을 본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는데, 환상을 보고 신비한 경험을 지금 간증하고 있는데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서 여기저기서 아멘이 터져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의 감동적인 회심이야기를 들은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22장 22-23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22)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23)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난리가 난 겁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다시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고, 이튿날에 왜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저렇게 하는지 이유를 알기 위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그들 앞에 세우고 다시 바울에게 말할 기회를 줍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는 겁니다. 여러분, 참 놀랍지 않습니까?
앞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만약에 바울이 아무런 보호 없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했으면 예루살렘에서 바로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누가 지키고 있습니까? 로마군대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부장이 모든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이 바로 온 공회 앞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변론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 사이에 내분이 벌어졌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큰 분쟁이 생긴 겁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인 반면 바리새인들은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바리새인이요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이렇게 말한 겁니다. 그래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큰 분쟁이 난 겁니다. 그러자 로마군대의 천부장이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해서 그 무리 가운데서 바울을 빼내어 다시 영내로 데려갑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에게 말합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 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드디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바울을 로마로 향하게 합니다.
자, 여러분? 처음에는 하나님은 바울을 어디로 인도했습니까? 예루살렘으로..그 인도하심에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순종했어요.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바울을 어디로 인도하고 있습니까? 로마로..
오늘 설교 제목을 ‘한 걸음씩 믿음으로 걷는 삶’이라고 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한꺼번에 인도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목표에 한꺼번에 도달할 수가 없는 죄 많은 인생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서 갈수 있도록 해 준다고 할지라도 곧바로 갈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을 한꺼번에 갈 수 있도록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백 걸음, 열 걸음씩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몇 걸음씩 인도한다고요? 한 걸음씩 인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코 우리에게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열 걸음 앞서서 인도해 주시고, 백걸음, 천 걸음을 앞서서 인도해 주시면 이것이 우리에게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걸음씩 한 걸음씩만 인도해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출애굽을 한지 약 2년 후에 그들은 가나안으로 정탐꾼 12명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직선 거리로 따지면 12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여러 가지 현실적인 환경들, 전쟁이나 지형의 험난함, 기후, 게다가 아무 때나 이동한 것이 아니라 구름기둥 불기둥이 움직여야 이동했기 때문에 약 2년이 걸렸어요. 2년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더 걷게 하셨습니다. 몇 년간을 더 걸었습니까? 38년간을 더 걸었어요. 그래서 그들의 광야생활이 40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출애굽한지 2년 만에 가나안으로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잘 살았을 것 같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민수기 13장을 보면 12정탐꾼들의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의 모습은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은 1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지도자로 세운 모세에 대한 존중함이 전혀 없어요.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가지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데 뭐라고 말했습니까?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이에 서로 말하되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말을 하는데?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여러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 모세를 죽이고 다시 애굽으로 가겠다는 겁니다.
그러자 여호수아와 갈렙이 막아섭니다.
‘아니다 우리가 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들은 우리의 먹이이다“
그러자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믿음을 가진 상태였습니다. 이런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가나안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을 열 걸음 백 걸음 인도하지 않고 한 걸음씩만 인도하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걸음씩만 나아갑시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갑시다. 그런데 한 걸음씩 걸어가는 모든 발걸음이 불신의 발걸음이 아니라 믿음의 발걸음이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절) 말씀을 보면 어둠을 비춰주는 내 발의 등은 저 먼 길을 비춰주지 않습니다. 내 앞길만 비춰줍니다. 그러나 저 멀리를 내다볼 수는 없어도 내 앞길만 비춰주는 그 등불을 따라 충실히 걸어가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걸음 한 걸음 내 걷는 발걸음이 믿음의 발걸음이어야 합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지 못한 것 같아도, 내 생각보다 조금 더디게 가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걸어가는 그 믿음의 한걸음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잘 풀리지 않는다고 서두를 것 없어요. 두려할 것도 없어요. 지금 걷는 발걸음이 중요합니다. 지금 걷는 발걸음이 믿음의 발걸음이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발걸음이면 잘 인도받는 겁니다. 잘 가는 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천국의 계단을 걸어가는 동안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의 발걸음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열걸음이 아니라 백걸음이 아니라 한 걸음씩만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의 발걸음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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